살이 찌네, 자꾸
몸무게 평생 최고점을 찍었다. 체중계가 고장 났나? 혹시나 하고 딴 식구에게 물어보니 아니란다. 그나마 체중이 가장 낮게 나올 아침 시간, 체중계가 놀라지 않게 천천히 한발씩 올려놨는데도 쯧쯧 바늘은 정확하다. 헤어진 첫사랑을 다시 만나면 ‘남자는 어김없이 후줄근해졌고 여자는 하나같이 뚱뚱해져있다’고 쓴 어느 소설 속 대사가 아니다. 내 얘기다. 체중이 불어서 자존감이 내려갔냐고? 오우 노우! 그건 아니다. 나이와 더불어 웬만한 일들은 저절로 넘어가지는 넉넉함과 향상된 자기만족도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수용하는 덕분이다. 우리 집 현관문은 사이즈가 커서 무거운 편이라 평소에도 좀 많이 열어야 드나들 수 있는데, 체중이 늘고 나니 같은 만큼만 열면 부딪히는 수가 있다. 그래서 몸동작이 느려지고 커졌다. 나이 든 사람답게 변화하는 내가 좋다. 늘어난 허리사이즈에 맞춰 바지를 새로 사는 즐거움도 있다. 10년 전에 샀는데도 그대로인 레깅스나 슬림 핏 진을 줄곧 입었었다. 요즘은 와이드 레그로 바뀐 새 트렌드에 맞춰 널널해진 통바지를 입어보니 바람이 슝슝 세상 편하다. 그러니 살찐 게 어찌 나쁜 일이기만 하겠는가 말이다. 난 예쁜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깎아 빚은 듯 이목구비 또렷한 친구들을 부러워했던 적도 있었는데 이런 감정이 나에게 아무 보탬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론 그냥 맘 편히 생긴 대로 산다. 어린 시절부터 말라깽이 이미지로 굳어온 내게 외모 자존감을 잃지 않도록 해준 사람은 아버지다. 함께 지낸 시절은 아주 짧았는데 돌아가시던 해, 병원에서 만난 아버지는 나를 볼 때마다 좋은 말을 하셨다. 우리 막내 얼굴이 환 하구나. 막내딸 얼굴을 보니 아버지는 아픈 데가 하나도 없어. 회사 동료들도 다 너를 예쁘다고 하겠지?… 나도 거울을 볼 줄 아니 얼마나 아니올시다 로 생겼는지 다 아는데도 아버지의 말에 따스한 위안을 얻었다. 말기 암, 신체적 고통으로 힘든 중에 아버지는 입원환자 병실에서 내가 입고 간 옷을 칭찬하였다. 그 옷은 너를 더 돋보이게 하는구나. 너의 취향을 아버지도 좋아해… 아버지는 더 이상 곁에 없지만 그 옷은 아직도 내 옷장에 걸린 채 그리운 추억을 부른다. 1.5세, 2세 자녀들과의 소통 문제로 상담실을 찾는 부모가 적지 않다. 때로는 부모 측에서, 때로는 자녀가 먼저 신청하는 상담이다. 독립해서 따로 사는 20대 딸이 상담실로 들어서는데 먼저 와있던 엄마가 한국어로 말했다. “얘! 넌 옷이 그거밖에 없니? 우중충 하게시리…” 딸의 자존감 패대기치기. 17살 소년의 엄마는 소파에 앉자마자 함께 데려온 아들의 등짝을 때리며 영어로 내뱉었다. “어깨 좀 펴라! 니네 엄마가 뭘 안 해줘서 넌 맨날 얼굴이 부어서 다니니?” 아들 기분 잡치기. 자녀의 외모를 직접 언급해서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말은 흔히 한국문화 배경 안에서 아무렇지 않게 사용되는 표현들이라 더욱 위험하다. “어머머, 너 여드름 났네?” 본인도 이미 알고 속상해 하는 일을 굳이 지적할 필요는 없다. “살이 찐거니, 부은거니?” 이것도 금지 표현. “너 얼굴이 너무 상했다. 무슨 문제 있니?” 자식에게라도 실례 만점이다. “어디 아프니? 안색이 왜 그렇게 안 좋아?” 아무렇지도 않은데 이런 말을 들으면 그때부터 아파질지 모른다. 간 크게 이런 말을 할 땐 돈 내고 할 것. 체중이 갑자기 늘거나 심각하게 줄어들거나 등 신체 변화에는 병리, 환경적 원인 외에 심리적 요인도 작용한다. 식욕부진, 폭식의 이슈를 정신의학에서 다루는 이유도 거기 있다. 거울에 비친 나를 보며 ‘너무 쪘나? 너무 말랐나?’를 고민할 땐 뚱뚱이든 삐쩍이든 그 왜곡된 신체 이미지의 근거가 무엇인지 먼저 체크해보기를 권한다. <김 케이 임상심리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