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첫 차
20대에 가장 가지고 싶은 물건은 뭘까? 한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첫 직장, 첫 월급을 타자마자 나는 대망의 중고차를 한 대 샀다. 나만큼 세상을 오오래 산 사람이 아니면 이름도 첨 들어봤을 기아 브리사! 현대 포니와 더불어 한국 자동차 역사의 기념비적 모델이자 2017년, 영화 ‘택시운전사’의 송강호가 뒷좌석에 독일기자를 태우고 달렸던 바로 그 차다. 당시 쥐꼬리 월급쟁이가 살 수 있는 새 차는 물론 없었고 회사 대출을 받아 중고차 중에서도 그나마 싼 모델을 골랐다. 키를 넘겨받고 집까지 운전을 하고 오는데 세상을 다 가진 듯 가슴이 벅차올랐다. 오른쪽 창가에 달린 안테나를 손으로 뽑아 올리고 라디오를 켰더니 스피커에서 음악이 나오네. 유리창문을 내리려고 뻑뻑한 손잡이를 태엽 감듯 돌리면 어떤가! 할리웃 영화에서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머릿결 날리는 게 그리도 부럽더니만,
아아 좋다! 이 차를 내 방까지 데리고 들어갈 수는 없을까? 어찌 차를 바깥에 세워두고 나만 들어가 자리에 눕는단 말인가. 퇴근 후라 이미 바깥은 어스름 달밤. 담요랑 베개를 들고 차로 나갔다. 강철인지 양철인지 자동차 앞부분 후드를, 사랑하는 애인 안 듯 허리를 구부려 안아보기도 하고, 그 위에 가만히 엎드려 귀를 대고 뚜둑뚜둑 엔진 식는 소리를 차의 심장 뛰는 소리로 듣기도 했다. 그 밤 이후 이제까지 자동차가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인적은 또 없는데 그렇다고 이상한 상상은 금물. (참고: Mechanophilia 란 자동차나 모터사이클 등 기계를 보면 성적 흥분을 느끼는 변태도착증으로 정신질환의 일종) 다신 느껴보지 못할 인생 첫 차의 추억이다.
그 후 미국에 와서 탔던 참 많은 차들이 첫 애인보다는 고급이었을지 몰라도 내 안에서 그때와 같은 눈 먼 애정은 더 이상 발화하지 않았다. 인기 모델의 경우 아낌없이 마크업(markup)을 내기도 했고 캘리포니아 기후에 맞춰 날렵한 컨버터블을 타기도 했으며 탱크처럼 느꼈던 미국산 대형 SUV, 아이들 픽업 땐 밴으로, 위험한 밤거리를 감안한 안전 위주의 차도 탔으나 처음 며칠 간 가죽시트에서 나는 ‘새 차 냄새’를 즐겼을 뿐 그 날의 감흥은 이어지지 않았다. 경제학자 허만 고센의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 목마를 때 벌컥 들이킨 맥주 첫 모금의 맛이 둘째 모금 이후에는 점점 떨어진다는 그 이론으로 이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을까?
지구 사랑 차원에서 지금은 친환경 전기차를 탄다. 개솔린 엔진이 아니니 부릉부릉 소음은커녕, 아무 소리도 안 났다가는 보행자 안전이 염려되므로 법적 기준에 따라 일부러 만들어진 스스스스 기계음이 날 뿐이다. 중고차지만 후드를 쓰다듬으며 애무행각을 방불케 했던 그 시절, 그런 흥분과 애정은 없다.
우리 집 마당에 잔디를 깎아주러 10년 째 오는 호세는 풍뎅이 차를 탄다. 모양은 밴 같은데 오리지널 모델을 도저히 알 수 없는, 얼기설기 여러 중고차에서 갖다 붙인 문짝과 대시보드들이 이룬 각종 조합 밑에 짝짝이 신발처럼 바퀴 네 개가 굴러간다. 얼마 전엔 보라색 바디에 자주색 도어였는데 지난 주 친구에게 얻은 광택 페인트를 그 위에 덧바르는 바람에 커다란 풍뎅이처럼 보인다. 호세는 이 차를 아낀다. 엊그제는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마치더니 사람 좋은 웃음 가득 얼굴로 내게 익스큐즈를 구한다. “오늘 내 아들이 이 차로 면허시험을 봐야 해서 좀 빨리 가는 거 미안해. 다음 주에 더블로 일할게.” 호세는 마른 걸레로 풍뎅이 유리창을 한 번 더 문지르고 휭하니 떠났다. 한계효용이고 뭐고 호세는 늘 나에게 ‘지금 여기’의 행복을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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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케이 임상심리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