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 공급자

내 컴퓨터 책상은 ㄷ자로 생겨서 가운데 뺑뺑 돌아가는 회전의자를 놓고 쓴다. 일하다 지루해지면 회전의자를 동-서-남, 남-서-동으로 돌려가며 딴 짓을 한다. 책상 위는 연필 꽂을 자리도 없이 지저분하다. 마시던 커피 머그 그대로, 먹다 남은 귤껍질 그대로, 아직 안 뜯은 편지와 보내야할 서류가 그대로, 동시에 읽는 중인 책 두 세권이 중간 페이지 접힌 채 그대로. 이걸 보고 누군가 내 성격이 털털하다고 말하면 잘못 본거다.

성격이 깔끔하지도 못하면서 못 참는 게 있는데 접시 위에서 반찬국물이 서로 섞이는 게 싫다. 뷔페식 상차림에 가면 진수성찬을 제대로 못 먹어보고 배고픈 채 집에 와서 라면을 끓여먹는다. 미국 식당에서 으깬 감자 옆에 계란 후라이와 토스트가 함께 놓인 것도 싫다. 걸쭉한 그레이비소스가 계란에 묻고, 터진 계란 노른자가 흘러 토스트에 묻었을 테니까. “까칠하기는!” 욕해도 할 수 없다. 못 하는 건 못 한다. 아는데 못 고치는 거가 바로 성격이다.

이렇게 못된 성질, 까칠한 성격, 울퉁불퉁한 기질, 인격 등이 괴상하면 정신장애라고 불러도 될까? 미국정신의학회가 만들어 전 세계가 공유하는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편람’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10가지 ‘성격(인격)장애’가 그것이다. 습관, 성격, 사고방식 등이 어쩌다 그러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사회적 기준에서 극단적으로 벗어나서 일상생활에 문제를 일으킨다면 장애가 맞다.

상담 장면의 수많은 케이스에서 성격 장애를 보는 경우도 흔한데 이들은 대개 현실과 동떨어진 방식으로 고집스럽게 자신이나 타인을 바라본다. 결과가 부정적일게 뻔한데도 자기의 부적절한 사고방식, 행동 패턴을 이어간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자기애성 성격장애. 나르시시스트 본인은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문제로 여기지 않지만 함께 사는 배우자의 고통은 크고 고민은 깊다. 그런 배우자를 견디다 못해 이혼을 떠올릴 지경이 되어도 나르시시스트 당사자는 자기 태도를 바꿀 생각이 없다.

나르시시스트 배우자는 자기 능력을 과대평가한다. 업적을 과장하다보니 자기만 중요하고 고생한 배우자의 능력은 하찮아 보일 뿐, 더 희생하라고 강요한다. 별 근거도 없이 자만하고 재능을 자랑하면서 배우자의 존경을 원하며 특권의식을 가진다. 자기는 비범한 사람이어서 위대한 사랑을 하고 유명한 인물들과 어울려야 하며 명함에 잔뜩 새긴 오만가지 시시한 직함을 가지고 자존감을 유지한다. 남들에게서 늘 과도하게 감탄을 받아야 하는데 자기의 별 볼 일 없음을 속속들이 알아버린 배우자가 그걸 채워주지 않으니 점점 분노하고 모욕 반응을 보인다. 참고 사는 배우자에게 폭력적이 되거나 잘못을 빌 때까지 괴롭히거나 비열한 방식으로 앙갚음을 하기도 한다.

나르시시스트는 그렇다 치고, 배우자가 나르시시스트라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그 상황에 빠져있는 사람은 왜 그럴까? 이런 사람은 참고 사는 자신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과 자녀들에게까지 희생을 강요하는데도 계속 나르시시스트 배우자의 욕구를 채워주고 있는 ‘나는 누구지?’가 스스로에게 던져볼 질문. 이런 존재를 심리학에서는 ‘나르시시스트 공급자(Narcissistic Supply)’라고 부른다. 공급자가 된 배우자는 혼돈스럽다. 스스로를 잔소리 들을 사람이 아니라고 여긴다. 공감능력 없는 나르시시스트 배우자가 무엇인가 불평할 때 그 요구가 지나친 것임에도 불구하고 미리 완벽하게 준비해두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난다면 전형적인 공급자 유형이다. 배우자의 요구를 끝없이 허용해온 것이 본인의 ‘착한 아이 신드롬’ 때문일 수도 있다. ‘착한 사람’이라는 반응을 얻기 위해 자신을 억압해왔다면 그것 역시 심리 콤플렉스다. 성격이 인생이고, 인생은 성격이다.

<김 케이 임상심리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