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살이 늙었다고?
잔인하지만, 성장이 멈춘 시기부터 노화는 시작된다.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할아버지! 라고 처음 불렸을 때 어떤 느낌을 가졌나? 나이 어린 점원이 할머니! 라고 부른 게 남이 아니라 자기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느낌은? 젊은이가 예의를 갖춘다고 “어르신!”하고 부르면 어떤 기분이 들까? 노년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내가 나를 생각할 때와 남을 바라볼 때의 ‘노화인식’이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 ‘내 맘은 아직도 청춘’이라서 스스로 그렇게 늙었다는 생각이 안 들지만, 자신과 동갑짜리 친구를 보면 눈가의 주름과 느릿한 행동거지가 영락없는 ‘늙은이’로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나이를 추측할 때 대개는 얼굴 주름 같은 외모에 의존하는데 스탠포드 의대 연구팀은 단 한 방울의 혈액 안에 들어있는 혈장 분석을 통해 노화 정도를 알아보는 과학적 방법을 개발했다(2019년 연구). 18세부터 95세 사이 4,300명을 대상으로 한 실험 결과, 사람이란 생각처럼 서서히 늙어가는 게 아니라 일생을 통해 3번의 ‘확 늙는 시점’이 있더라는 것. 연구팀은 “혈장에 있는 수천 개 세포가 몸 전체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한 장의 스냅 샷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밝혀진 3번의 시점은 평균 34세, 60세, 그리고 78세. 나이가 들어가는 동안 혈중 단백질 수준이 한동안 일정하게 유지되다가 3개 나이 때 갑자기 위, 또는 아래로 이동하면서 눈에 띄게 변화가 일어나더라는 설명이다. 이 결과에 따른다면 흔히 65-75세를 초기 노년기, 75세 이상을 후기 노년기로 나누는 기준점, 75세를 78세로 이동시켜야 할지 모른다.
‘노화인식’은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행동과, 일을 처리하는 능력, 인생을 보는 방식이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모든 경험을 말한다. 이 체험은 순전히 주관적이지만 대다수 노화인식은 신체 기능이 떨어지고, 인지 기능이 저하되면서 암울한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초고령 사회인 일본에서 7년 전 일어났던 끔찍한 사건은 인간을 생산성으로 점수 매기려는 사회병폐 속에서 일어났다. 한 장애인 복지시설에 침입한 범인이 26명을 대상으로 흉기 테러를 벌였는데 범죄 동기를 묻는 기자들 질문에 범인의 대답은 태연하다. “사회에 도움이 안 되는 장애인은 안락사 시키거나 살처분하는 게 맞다.”
사회가 노인을 보는 시각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미래를 위해 생산성 떨어진 노인들은 쓸모없다’는 위험한 발상에 대해 반발하는 영화가 지난 해 일본에서 제작되어 칸영화제 특별상을 수상했었다. 영화 ‘플랜 75’는 이렇게 시작한다. 고령화로 인한 사회혼란 속에서 75세 이상은 누구나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법이 제정되는데, 이름 하여 ‘플랜 75’. 죽음을 국가에 신청하면 정부가 이를 시행해주는 제도이다.
담당공무원들이 공원에 나가서 노인들에게 죽음을 권유하기도 하고 마지막 여행이나 장례에 사용할 수 있는 ‘죽음 장려금’을 지원하기도 한다.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사는 78세 여주인공도 이런 정책에 조금씩 마음이 기운다. TV에서는 ‘원할 때 죽을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는 공익광고가 이어진다. 화낼 필요는 없다. 실화가 아니라 영화 줄거리니까.
이화여대의 또 다른 연구(2015년)에서는 ‘노화 인식’이 건강한 사람은 일상생활에서 건강한 활동에 투자하는 시간이 더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노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부정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보다 치매 전단계인 경도인지장애에 걸릴 확률이 낮았다. 노화를 죽음으로 가는 마지막 스텝이 아니라, 삶의 다채로운 모습 중 하나로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주변에 활동적인 90대가 너무 많다. ‘100세까지 건강하게!’라는 슬로건도 곧 ‘100세 이상’으로 바뀔 것 같다. 그러니 75세는 아직도 싱싱한 청춘이다.
<김 케이 임상심리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