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벽증

노인 아파트에 혼자 사시던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몇 달 전, 스스로 세간을 정리하셨다. “나 떠난 담에 너희들 편하게 해주려고…” 병환중인 것도 아니어서 자식들이 듣기엔 웬일인지 가슴 철렁했지만 그저 정리벽이겠지 하며 지나쳤다. 나중에 보니 평생 털고 쓸고 닦고 개성깍쟁이 소리를 듣던 분의 깔끔한 성격대로 짐정리는 손댈 데 없이 완벽했다. 옷장에 한 두 벌, 캐비닛에 그릇 한두 개를 빼고는 모두 도네이션 센터에 보냈다. 아무도 예상 못했는데 얼마 후 어머니는 응급실로 실려 가셨다. 입원에 필요한 서류를 찾으러 빈 아파트에 가보니 맨 아래서랍에는 곱게 접은 한복이 들어있었다. 아들 결혼식에 입었던 하늘색, 그리고 딸 결혼식에 입었던 분홍색 치마저고리, 두벌이었다. 세상 떠나시던 날 이 중에 하나를 골라 입혀드린 건 물론이다.

완벽주의자 어머니의 자식인 나는 일부러 안 털고 안 쓸고 안 닦는 것으로 소극적 반항을 했다. 난 늘어놓는 게 좋아. 어질러 있어야 뭐가 어디 있는지 알지, 치우면 나중에 힘들게 찾아야 한다고. 우리 집 청소를 도와주러 오는 레이디도 한눈에 나를 파악, 놓인 물건은 절대로 안 치우고 기역, 니은, 디귿… 자로 물건의 주변을 돌아가며 먼지를 닦는다. 땡큐다. 폭격 맞은 것 같은 애들 방은 안 들어가고 안보면 그만이다.

가족끼리 이런 습관이 다르면 갈등이 생긴다. 치약뚜껑을 열어놓고 사는 사람과 반드시 끼워 제자리에 두는 사람은 부딪힌다. 치약을 중간부터 짜는 사람과 끝부분을 아물려가며 쓰는 사람, 비누에 물기를 꿀쩍거리게 두는 사람과 말려서 반듯하게 세워놓는 사람, 밥 먹은 설거지를 곧바로 하자는 사람과 싱크대에 산더미처럼 쌓았다가 나중에 하자는 사람, 양말을 동그랗게 말아서 벗는 사람과 똑바로 쭈욱 잡아당기는 사람, 어이없지만 소소한 습관이 싸움의 시작이기도 하다. 치우는 사람 따로, 늘어놓는 사람 따로 라는 억울함이 부딪힌 게 아니라 각자의 성격이 부딪힌 결과다.

정리벽이 심하면 결벽증이 된다. 결벽증은 강박증(OCD; Obsessive Compulsive Disorder)의 한 종류다. 결벽증이 오염과 세균에 대한 병적인 공포라면 강박은 생각과 행동 두 가지로 나타난다. 결벽이 있으면 스스로를 강박 상태로 만들어 본인도 괴롭고 타인도 괴롭게 만든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특정 행동이나 습관을 반복한다. 강박증은 문을 잠갔는데도, 스위치를 껐는데도 자꾸 다시 가서 확인하는 확인강박, 물건이 제자리에 없으면 불안하고 배열상태도 가지런히 있어야 마음이 놓이는 정렬행동, 특정행동이나 생각을 안 하려고 하는데도 자꾸 반복하는 반복행동들이다.

미국 OCD 치료학회가 제시한 결벽증 자가 테스트 질문에 4가지 이상 예스라면 결벽증을 의심할 수 있다. (1)집에 손님이 오는 게 너무 싫다. (2)바닥에 머리카락 하나라도 떨어진 걸 줍지 않고는 못 배긴다. (3)남이 내 물건을 만지는 게 불안하고 싫다. (4)남의 집에 가면 청결상태를 먼저 확인한다. (5)손에 더러운 게 묻지 않았는데도 하루 10번 이상 씻는다. (6)공용화장실은 오염되었을까봐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다. (7)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를 때 남에게 부탁하거나 옷소매로 손가락을 감싸서 만진다. (8)신발이나 수저, 펜 등이 나란히 놓이지 않으면 불안하다.

나의 새해 결단은 ‘정리정돈’이다. 정리의 화신, 곤도 마리에만 최곤가? 나도 야심차게 무빙박스를 50개나 사왔다. 개성댁 딸답게 올해는 나도 정리하며 살아보자. 근데 문제는 이 박스를 산 게 올해가 아니라 작년 이맘때의 일이었다는 사실! 이렇게 게을러서야! 에고고.

<김 케이 임상심리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