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만들기

미국에는 고아원이 없다. 아동복지를 위탁가정 시스템으로 대신한지 이미 110년. 내가 처음 위탁모 트레이닝을 받던 날, 직원이 말했다. “당신의 애들 사진을 가지고 오셨나요?” 그건 늘 지갑 속에 들어있었으므로 별 신경 쓰지 않고 클래스 룸으로 들어갔다. 서른 명 남짓 교육생을 둘러보니 백인이 반, 흑인이 반, 아시안은 나 혼자. 교육담당 소셜 워커가 환영인사와 함께 자신을 소개한 뒤, 학생들에게 말했다.

“애들 사진을 꺼내서 이 박스에 담으세요.” 모아진 사진을 뒤섞더니 한 장씩 뽑아 무작위로 사진을 나눠주었다. 내가 받은 사진은 어느 백인 아동의 웃는 얼굴, 내 아이 사진은 체구가 커다랗고 수염 난 흑인 남성의 손에 들어갔다. 곧이어 교육담당자가 말했다. “지금, 사랑하는 내 아이의 사진이 처음 보는 다른 사람에게 가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포스터 차일드가 다른 가정에 들어간 첫날 느끼는 감정입니다.”

두 번째 클래스에서는 한 백인 청년이 앞에 나와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나는 3살 때 처음 위탁가정에 맡겨졌습니다. 친엄마는 당시 18살, 성폭행으로 나를 임신한 미혼모였다고 합니다. 마약 범죄로 감옥에 들어갔고 당연히 양육권리를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위탁모는 나를 지극히 사랑해주었으며 1년 후에는 나를 입양했습니다. 강하고 친절한 성품의 양어머니 덕분에 나는 캘 스테이트를 최우수학생으로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졸업식을 일주일 앞두고 양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고 친자식들은 저에게 떠나달라고 말했습니다. 한동안 방황했고 얼마동안은 홈리스가 되기도 했습니다. 교수님 소개로 직장을 얻었으나 머물 곳이 없어서 공원에서 잠을 잤습니다. 하루는 보스가 부르더니 첫 달치 렌트를 몰래 내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이때의 경험으로 나도 남을 돕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나는 지금 청소년 멘토링 프로그램에서 봉사하며 대학원에서 소셜 워커가 되는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교육과정이 끝나고 가족 모두의 신원조회를 마치자 담당 직원이 우리 집을 인스펙션하러 방문했다. 건물이 안전한지, 위험한 구조물은 없는지, 위탁아동이 지낼 방과 침대까지 꼼꼼히 살피고 나서 드디어 첫 케이스를 받게 되었다.

A는 17살 혼혈 소년. 백인 아버지는 마약중독으로 시설에 들어가고, 한인 어머니는 정신착란증세로 입원. A는 낡은 백팩에 옷가지만 두어 벌 담아가지고 우리 집에 왔다. A는 차려준 저녁에 손도 대지 않은 채 자러간다고 말했다. “어디 아프니?” 방문을 노크하고 조심스레 들어가 보면 침대에 조그맣게 꾸부리고 누워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렸는데 이불깃이 들썩들썩 하는 걸 보면 울고 있었을까?

A가 아주 조금씩 자신을 열어가기 시작하던 어느 날, 구역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미세스 김, A를 아십니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니야, 괜찮아. 살아만 있으면 되는 거야. 애써 침착하게 자신을 달랬다. “A의 가방에서 총을 발견했습니다. 고장 나서 작동이 안 되는 구식이라 일단 압수하고 A를 돌려보내드리겠습니다.” A는 경찰차에 실려서 뒤로 수갑이 채워진 채 집에 도착했다. 나는 맨발로 달려 나가 아직도 겁에 질린 A를 덥석 안았다.

“A야! 괜찮아. 이제 집에 온 거야. 여기가 너의 집이야.” A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앰 쏘리.” 우린 이후로 그날의 일을 누구도 먼저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듬해 A가 18세, 성인이 되어 군대로 떠나기 전까지, 느리지만 한발자국씩 천천히 마음을 열어가며 우린 서로 가족이 되어갔으니까. (총기휴대법안에 강력히 반대하며 텍사스 초등학교의 참극으로 고통 받은 모든 이들께 깊은 위로를 보냅니다.)

<김 케이 임상심리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