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처형자
얄롬 박사의 진료실에 처음으로 찾아온 사람은 조현병 환자였다. 이 환자는 얄롬이 CIA 비밀요원이라며 진료 중에 어디로 숨어버리곤 했다. 다음 세션에서 얄롬은, 환자가 자신을 믿을 수 있도록 운전면허증과 여권, 출생증명서를 준비하여 모두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 환자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죠. 이렇게 빨리 위조증명서들을 만들 수 있는걸 보니 제가 정말 CIA 요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스탠포드 명예교수인 얄롬박사는 정신과 개업의이자 유명한 소설가, 넌픽션 작가, 강연자, 비디오 제작자로 다방면에 명성을 날려 왔다.
그가 쓴 환자 사례집 ‘나는 사랑의 처형자가 되기 싫다’를 읽는 사람은 10개의 케이스마다 마치 자신이 환자가 되어 얄롬 박사와 함께 진료실에 앉아있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첫 주인공은 우울증을 앓고 있는 70대 여성 쎌마. 자신의 상담사였던 젊고 핸섬한 인턴, 매튜가 다른 병원으로 떠나면서 오래 전, 상담은 끝났다. 그때부터 매튜를 사모하며 다른 모든 상담사를 거부한다. 한해가 지난 어느 나른한 주말 오후, 쎌마는 우연히 샌프란시스코 거리에서 매튜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달려가 그와 커피를 마시고 저녁을 먹는다. 한 달간 이어진 만남에서 단 한 번의 섹스를 나누지만 그뿐. 매튜는 더 이상 쎌마를 만나주지 않는다. 연락이 끊긴 매튜를 그리며 쎌마는 자살을 시도하고, 그 후로 10년 가까이 상담을 받으면서도 우울증에 별다른 진전이 없다. 짧았던 한달의 데이트가, 쎌마에게는 달고도 쓴 사랑의 기억으로 각인되어 있다.
이런 쎌마가 어느 날 얄롬 박사와 만나 6개월 동안 매주 한번씩, 필요하다면 6개월 더 연장 치료를 받기로 약속한다. 상담에서 쎌마는 계속 매튜와의 추억, 자살 유혹만을 되풀이 이야기 한다. 얄롬 박사는 ‘매튜를 향한 마음이 사랑’이라는 쎌마의 믿음에 도전한다. 또한 ‘무엇이 매튜를 우상화하게 만들었을까’를 본인이 들여다보게 이끌어간다.
매튜를 그린다는 건, 쎌마가 과거에 머물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직면시키기도 한다. 얄롬 박사는 쎌마에게 롤 플레이(역할극)를 제안한다. 역할극 안에서 쎌마는 매튜가 되어보기도 하고 슬픈 쎌마 역할로 남아있기도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쎌마는 그토록 매튜에게 집착하는 이유들을 찾아간다. 결국 자신의 늙음이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내면의 공포심을 발견하고, 그것이 매튜를 강박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이유였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독백한다.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고.
쎌마의 거짓된 허상을 무너뜨려 ‘사랑의 처형자’가 된 얄롬 박사는 사랑에 빠진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말한다. 사랑은 상대의 실체가 보이지 않는 안개 속 신비로 지속되는 상태이다. 감각은 마비되고 이성적 판단이 멈춘다. 하지만 심리치료는 어둠과 싸워 불빛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늪 같은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 환자에게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일깨운다. 가짜 자기(Pseudo-self)를 대면시킨다. 감당하기 어렵다. 잔인하다. 그러나 해결해야할 문제이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그런 사랑은 없었으니까.
실존주의 상담은 인간의 고통과 죽음, 상실과 고립, 소외와 무의미를 마주한다. 그래서 ‘지금, 여기’가 중요하다. 사는 게 왜 이렇게 허망하지? 가질 것 다 가져보고 해볼 것 다 해봤는데 이제 와서 아무 의미도 못 느끼는 나는 뭐지? 묻고 싶다면…… 답은 한 가지!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길이 남아있다. 지난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그때 거기’ 대신,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훈련, 얄롬 박사가 가르쳐주는 실존적 레슨이다.
<김 케이 상담심리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