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돌이의 탄생

결혼 5년차 주부입니다. 남편이 별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삐져서 한 달 째 말을 안 해요.

코로나 풀려서 모처럼 주말에 바닷가 가자고 집을 나섰는데요, 프리웨이가 너무 막히는 거예요. 운전하는 남편한테 제가 그랬죠. “당신이 줄을 잘못 섰네. 저쪽 레인으로 갔으면 잘 빠질 텐데.” 남편이 갑자기 표정이 안 좋더니만 홱 돌아서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거 있죠? 그게 뭐 화날 일인가요? 제가 웃으면서 “당신 완전 삐돌이구나!”했더니 그때부터 입에 지퍼 채우고 말 안 해요.

삐돌이! 토라짐과 비슷하지만 같지는 않다. 이쁜 사람이 토라질 때 매력을 느낀다는 사람도 간혹 있으나 미운 사람이 토라지면 더 밉다. 삐돌이는 남 보기에 ‘그게 뭐 화낼 일인가’처럼 작고 사소한 사건에서 탄생한다.

삐짐이란 말은 영어로 정확히 번역도 힘들다. 주로 한국 문화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표현이다. 내가 화난 것을 상대방이 알아서 달래주고 위로를 원한다는 간접적 메시지다. 그래서 삐진 사람한테, 아니 도대체 왜 그래? 라고 묻는 건 사태를 악화시킬 뿐. 왜 화가 난건지도 모른단 말이냐! 라는 죄목이 하나 더 얹힐 위험이 크다.

한국인의 소통 문화는 ‘행위 교환’이 아니라 ‘마음 교환’이다. 미처 다 표현하지 않은 상대방의 마음을 읽고 알아차리고 적절히 공감을 표현해야 친밀하게 느낀다.

삐짐은 특정 사건에서 시작된다. 상대의 행동이 기대한 것과 차이가 날 때, 속마음을 몰라주고 이해해주지 않을 때, 충분한 배려를 느끼지 못할 때 일어난다. 자신이 상대에게 베풀었던 마음이, 돌아오는 것보다 더 컸다는 잠재된 억울함도 있다.

삐짐은 남들이 알아차릴 만한 수준으로 표현된다. 퉁명스럽게 굴기, 묻는데 대답 안하기, 돌아서 가버리기, 갑자기 입 다물기, 입술 삐쭉거리기, 일부러 밥 안 먹기 등등. 화내기(Anger)는 대상이 남일 수도 있고 자신일 수도 있지만 삐짐은 대상이 늘 남이다.

하지만 삐돌이에게도 고민은 있다. 삐짐 유발 사건 자체가 그다지 크지 않고 누가 보아도 사소하며 경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걸 가지고 화를 낸다는 게 스스로 당당하지 않다. 그래서 점점 더 삐진다. 삐돌이의 속마음은 ‘나 지금 삐졌어’를 부디 상대방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정보전달이 주요 목적이다. 전달하고 싶은 정보에는 ‘나 화났어’ 이외에 ‘내 편이라고 말해줘’, ‘위로가 필요해’, ‘친밀감을 확인해줘’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심리학의 감정 연구 대부분이 서양 학문 배경이라면, ‘삐짐’이야말로 한국적 심리기제라는 점 때문에 최근 한국심리학회를 중심으로 ‘삐짐’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들 연구(송경재 외, 2009)에 의하면 남성들은 주로 기대 좌절 때문에 삐지고(42%), 여성들은 무시당할 때(40%) 삐진다. 삐짐을 풀어주는 방식으로는 마음 알아주기(55%), 사과하기(22%), 행동 교정, 앞으론 안 그러기(13%) 등이 있다. 선물을 사주거나(4%) 내버려두기(4%) 에 비하면 공감 표현과 구체적인 사과만큼 중요한 점수 따기도 없다.

여자가 더 자주 삐질까? 아니다. 그런 주장을 지지할 만한 연구결과는 없다. 삐돌이 남친이나 남편 때문에 고민하는 여성들도 많다. 삐짐은 습관일까? 그렇다. 삐짐을 통해 달콤한 위로를 경험한 사람은 이후 더 자주 삐짐 표현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너 삐졌냐? 라고 단도직입 물었을 때 그렇다고 대답하는 경우는 13% 뿐.

한국인은 마음이 통하는 것을 친밀한 사이라고 규정한다. 그래서 속마음을 몰라주면 삐진다. 어렵다 어려워! 눈에 안 보이는 그누무 속마음! 삐돌이 탄생과 돌봄의 원리는 그러하다.

<김 케이 상담심리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