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은 뭣에 쓰나?
나는 혜화동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대여섯 갈래 되는 혜화동 로터리 한가운데 지구본 모양의 분수대가 있다. 신호등도 없는데 차들은 서로 사고 없이 지구본을 돌아 갈 데로 갔다.
아카데미 빵집과 동양서림과 장면 박사 고택. 그 건너편, 가톨릭 사제를 키우는 대신학교와 혜화동 성당, 여기가 내 길의 시작이다.
성당 전면을 장식하는 대형 ‘최후의 심판도’는 고 김세중 조각가의 부조 작품인데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로라’ 라는 복음서 구절이 함께 새겨져있다. 여기서 세례를 받고 나는 맹렬히 중등부 활동을 했다. 신심이 남달라서가 절대 아니고, 성당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흘끔 정면에 새겨진 말씀을 비꼬아 읽으며,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인지 아닌지, 어디 두고 보자.” 하는 10대 반항 끼 때문이었다.
이 시절, 평생 기억에 남을 친구와 선배와 스승들을 만났다. 이 중 한 수녀님이 그 해 수녀복을 벗었고 수사 한 분도 환속하였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일이 있었다. 이를 두고 중등부 멤버들이 옳다, 그르다, 와글와글 떠드는 동안, 나는 14처로 불리는 ’십자가의 길‘을 돌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힘든 길이었겠네요. 얼마나 깊이, 혼자 괴로웠을까요? 이런 분들을 위하여 수녀원에 들어가 상담하는 수녀가 되겠습니다.” 16살, 생각이 가는 길은 단순하고 무지하며 치기 어렸으나 그 고백이 진심이었던 것은 맞다.
한 학기를 마치고 겨울 방학이 시작되는 날, 수녀원을 찾아갔다. 붉은 벽돌 건물. 2층 돌계단을 올라 굳게 닫힌 출입문을 두드리니 한참 만에 젊은 외국인 수녀가 문을 열어준다. 원장 수녀님을 뵈러 왔습니다. 그분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길고 어두운 마루 회랑을 걸을 때 내 발자국 소리가 한 박자씩 늦게 나를 따라왔다. 복도 맨 끝 방, 라디에이터에서 치익칙 스팀 소리가 나고 한참 만에 원장 수녀님이 안쪽에 있는 문에서 나타났다.
준비해서 외워온 영어로 그분께 말했다. “이 수녀원에 입소하기를 원합니다. 나에게는 확실한 소명과 사명이 있습니다.” 코끝에 걸린 안경 너머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더니 그분이 대답했다. “여기는 교육사업에 목적을 둔 수도회입니다. 그러니 우선 대학 공부를 마치세요. 그 후에도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그때 다시 오십시오.”
나는 대입 1,2,3 지망 모두 심리학과를 쓰고 심리학 전공생이 되었다. 프로이드와 융과 라깡을 만나고 올포트와 반두라와 촘스키와 프랭클과 매슬로와 스키너와 로저스와 밀그램과 분트와 짐바르도와…… 심리통계와 심리측정과 정신병리와…… 심리학과를 간다고 하니 주변 어른들이 말렸다. 의대나 법대 가야지. 그까짓 심리학은 해서 어디다 쓰게? 당시 한국은 산업화의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 생산과 효율 최고 가치의 시대를 걷고 있었다.
그런가? 심리학은 해서 뭣에 쓰는 거지? 심리학의 학문적 목적은 인간의 심리와 행동을 설명하고, 예측하고, 통제하는 것이다. 공부는 디립다 오래 많이 하고, 돌아오는 리턴은 적은 분야, 세상 기준으로는 쓸 데 없는, 그러나 임상과 상담을 통하여 시들어가는 한 인간의 손을 잡고 긴 여정을 함께 하며 마침내 그를 다시 생명으로 물 오르게 하는, 그게 쓰일 바이다.
얼마 있다가 혜화동에서 이사를 하면서 나는 곧바로 성당도 심리학도 잊었다. 세상이 재밌어 죽겠는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으르렁거리는 욕망과 천 길 낭떠러지 공허 사이를 왔다리 갔다리. 수녀원도 잊었고, ‘길과 진리’도 잊었다. ‘심리학’과는 거리가 먼 ‘쓸모 있는’ 직업에 종사하다가 미국에 와서 어느 날 다시 전공으로 돌아왔을 때, 그 이름은 ‘행동과학’으로 개명되어 있었다.
인간의 심리와 행동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이해하는 일은 나에게 큰 기쁨이다. 참된 내적 성장은 얼핏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걸 믿기 때문이다.
<김 케이 상담심리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