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피부는 접촉을 원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나는 병실에서 임종을 지켰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불규칙한 호흡에 고열로 바짝 마른 입술이 힘겹게 움직이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여러 가닥의 호스에 연결된 아버지의 귓가에 내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대고 나지막이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한 번도 해보지 않던 말을 했다. 아버지! 사랑해요! 그때 아버지의 감겨진 두 눈에서 눈물 두 줄기가 천천히 흐르더니 움푹 패인 뺨을 타고 내렸다. 그 다음엔 갑작스런 적막. 모니터 정지. 한때 어린 나를 번쩍 안아들었을, 그러나 이젠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는 아버지의 팔뚝에 내 젖은 두 눈을 가져다 댔다.

얼마 전 친척 노인 한분이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평생 껴안고 입 맞추던 사랑하는 아내, 팔씨름을 하고 목마를 태워주던 아들, 딸, 누구와도 끝내 손을 잡을 수 없었다. 가족들은 플라스틱 투명커튼을 사이에 두고 얼굴과 온몸에 방독면처럼 생긴 장비를 두른 채 한 번에 한 명씩만 병실에 들어갔다. 숨이 멈추기 전, 산소호흡기에 막힌 입으로 실은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었는지 알 수 없다. 수개월 병원 생활 내내 그분의 몸은 고무장갑 낀 손들에 의하여 만져졌을 것이다. 코로나 방역 기준대로 시신은 아홉 겹 보관 백에 담겨져 이동했다.

친구와 직장동료, 선배와 후배들의 살을 만져본 게 언제였더라? 우리는 지금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없게 됐다. 덥석 껴안고 어깨를 두드려도 안 된다. 힘차게 악수하고 팔을 끌어당겨 뺨을 부비고 싶어도, 그러면 안 된다. 나도 안 되고 너도 안 된다. 멀찍이서 고개만 까딱. 운동화 신은 발끝끼리 툭 치는게 인사란 말인가? 신체 접촉이 사라진 황량한 세상은 쓸쓸하다. 어린이에 비해 성인은 촉감에 덜 의존하지만, 역시 외롭고 취약하다. 자기 인식이 높은 노인층은 젊은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피부 접촉이 필요한데도 기회는 오히려 적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접촉 고픔’(Skin Hunger)이라 부른다. 오늘 우리는 신체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누구나 배고플 때 음식을 갈망하고 피곤할 때 잠을 갈망하는 것처럼, 외로울 때 만지기(만져지기)를 갈망한다.

무기수 피터 콜린스는 독방 감금 32년 째 되던 해 암으로 사망했는데 나중에 발표된 영화 기록 속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어느 날 문득 잠결에 내 다리를 쓰다듬는 아내의 손길을 느꼈습니다. 충격과 흥분으로 눈을 떴는데 그게 실은 파리였다는 걸 알았죠. 나는 인간의 손길이 너무도 그리웠던 탓에 다시 눈을 감고 그녀의 손가락 인 척 상상하기로 했어요. 더 이상 혼자 남겨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완벽하게 가만히 있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파리는 나의 뺨으로 올라와 자신의 피와 타액의 혼합물을 피부에 발랐고, 그것은 유일하고도 생생한 접촉의 원천이었습니다.”

심리학자 시드니 주라드는 전 세계 커피숍에서 커플 행동을 관찰했다. 한 시간 동안 푸에르토 리코의 커플들은 서로 180번 만졌으며, 파리의 연인들은 110번, 시카고에서는 2번, 런던에서는 제로였다. 연결된 행복도 조사에서 남미인들이 가장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마이애미대학 부설 ‘터치 연구소’는, 접촉이 스트레스를 줄이고, 심장 박동 조절, 혈압 유지, 능률 향상을 이룬다는 사실을 신체과학실험을 통해 밝혀냈다. 맑은 정신을 유지하려면 하루에 4번, 신체건강 유지에는 하루 8번, 진정한 성장에는 하루 12번의 포옹을 권장한다. 언제쯤 우리는 이 ‘접촉 고픔’에서 벗어나게 되려나?



<케이 김 임상심리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