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피트 거리에서

심심하다. 외롭다. 무력하다. “그 영화? 벌써 본거야!” 넷플릭스에, 훌루에, 유투브에......안 본 영화가 거의 없다. 하루 종일 집에 갇혀 지내다보면 몸도 괴롭지만 정신적 피로감이 이만저만 아니다. 속수무책,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사회적 거리두기, 격리뿐이다. 참 단순해 보이는 이 조치가 우리 일상에 놀라우리만치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 평소엔 즐기지 않던 드라마를 들여다보며 정신 뺏기는 건 내가 딱 주인공 심정이고 주인공 얘기가 꼭 내 얘기 같기 때문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적 감정이입이다.

이런 감정이입을 버리라고 말한 세기의 극작가 겸 시인, 저 유명한 브레히트! 그의 시 ‘1492년’은 이렇다.

‘미합중국의 시민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심사하는 이민국 판사 앞에 늙은 이탈리아 식당 주인이 왔다. 진지하게 준비해왔지만 유감스럽게도 새 언어가 너무 어려워 매번 시험에서 떨어졌다. 판사가 뭐라고 질문하던, 그는 머뭇거리다가 1492년이라고 대답했다...(중략)... 판사는 그를 위하여 질문을 바꾸었다. 언제 아메리카가 발견되었는가? 그는 1492년을 말했고, 정확한 답변을 근거로 마침내 시민권을 얻었다’

브레히트는 미학적 감정이입 대신 ‘거리두기’를 하자고 주장했다. 그의 ‘거리화 효과’는 정신없이 빠지기보다는 자신을 멀리 떼어놓고 보면 그 대상이 낯설어지면서 자명한 것, 알려진 것, 명백했던 것이 제거되고, 대신 놀라움과 호기심을 자아낸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지켜가는 사회적 거리는 최소한 6피트. 사회심리학자 보가더스는 여러 그룹 사이의 친밀도 혹은 혐오감, 거리감을 평가하는 사회적 거리 척도를 개발했다. 정치, 경제, 사회, 정책, 광고... 사회과학분야에서 다양하게 응용된다. 이들이 측정하는 거리감에는 신체적인 면과 사회적인 면이 있다. 괄호 안에 자기가 측정하고 싶은 대상의 이름을 넣어보자.

우선 신체적 거리감 질문. 나는 (아무개)와 친구로 지내고 싶다, 나는 (아무개)를 우리 집 저녁 식사에 초대할 만큼 가깝게 지내고 싶다. 나는 (아무개)와 거리에서 지나치며 하이! 하는 정도로만 친하고 싶다.

이번엔 사회적 거리감. 나는 (아무개)가 시의원으로 나오는데 찬성이다. 나는 (아무개)와 같은 모임에 참석하기를 원한다 등등. 이런 식으로 (나)와 (아무개)에 들어갈 그룹 대상을 확대시키면 백인층과 이민자 간의 사회적 거리감, 특정종교인들과 성소수자 간의 사회적, 신체적 거리감 등도 측정할 수 있다.

지금 지구촌의 사회적 거리두기는 개인 또는 집단 간 접촉을 최소화하여 전파를 감소시키는 공중보건학적 통제 전략이다. 개인과 개인, 위험이 높은 그룹과 낮은 그룹을 분리시키는 방식. 행정명령대로 6피트 떨어지니 친구, 이웃, 사회가 다르게 보인다. 내가 못 봤던 나 자신도 보인다. 소중한 것과 하찮았던 것의 가치가 바뀌어 보인다.

WHO 신종질병관리팀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물리적 거리두기’라는 말로 바꾸자고 호소한다. 물리적으로는 떨어져 있더라도 여러 방법으로 서로 계속 연결돼있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2년 전 영국은 ‘고독관리부’를 행정부서로 채택하고 장관급을 임명했다. 외로운 사람들, 고립된 인구 층을 사회 네트웍 안으로 불러들인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 지원 그룹과 연결된 일원임을 강조하는 정책이다.

평소 시끌벅적 번잡하던 올림픽길 오피스 창밖 거리, 한낮인데 걷는 사람이 없다. 어마어마한 확진자 숫자와 안타깝게도 생명을 잃은 분들, 그리고 뉴욕의 무연고자 집단매장지의 참혹한 포토뉴스를 떠올린다. 무력하다. 물리적 거리, 6피트 너머에 멀찍이 서서, 그다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진 나를 본다. 평생 해왔으나 지금 상황에선 아무 소용없어진 일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리고 건너편에 서서 외로워하는 사람들을 본다.

연방정부 차원의 정신건강기관들도 불안감과 우울증, 자살, 재난 스트레스 관련 24시간 핫라인을 설치했다.(800-985-5990) 외로움의 반대말은 무얼까? 나는 ‘연결’(Human Connection)을 생각한다. 무섭고 슬픈 2020년 봄, 나도 연결 당하고 싶다.



<케이 김 정신건강 카운슬러>